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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엿보기

[책 엿보기: 평균의 마음 4] 현대인인 여성이 고전을 읽을 때: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21. 11. 16.

소수 엘리트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고전

오늘날 고전으로 손꼽히는 문학작품 대다수는 여성인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되었다. 이 말은 실제 독자의 성별과는 무관하게, 소설 속 화자가 상정하는 ‘가상의 청자’가 당대의 남성 대중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 남성이란 일정 정도의 지식과 재산을 소유한 자유민을 가리켰다. 노예나 농노인 남성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여성보다 더 독자로 상
상되기 어려웠다. 봉건시대에는 귀족이나 영주 가운데도 문맹이 적지 않아서 고전은 소수의 엘리트와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다. 책은 다른 어떤 문화 생산물보다도 신분과 계급에 민감했다.

이로부터 어떤 이들에게는 필연적 질문이 생겨난다. 여성인 독자가 고전을 읽을 때 그녀는 자신을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소설 속에서 주변적이거나 대상화된 여성에만 감정 이입할 수 있다면, 그 많은 고귀하고 비천한 남성 주인공의 투쟁서사를 수고스럽게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종종 여성인 독자가 고전의 인물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여성은 창작자는커녕 온순한 독자로서도 자주 자격 미달이라는 판정을 받곤 한다.

조지 엘리엇. 출처: 위키피디아

고전을 탐독한 19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조지 엘리엇

조지 엘리엇은 1819년 영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너니턴Nuneaton 외곽에 위치한 아버리 영지Arbury Estate에서 태어났다. 엘리엇의 아버지는, 독신이었던 5대 남작 로저 뉴디게이트가 세상을 뜬 후 직계 후계자가 없어진 아버리 영지의 위탁 관리인이었다. 엘리엇은 어릴 때부터 두드러지게 영특했고 배움의 욕구가 강했다. 엘리엇의 아버지는 엘리엇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다섯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세 군데 기숙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렇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이 여성 작가의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로, ‘조지’는 그녀의 평생 파트너였던 조지 헨리 루이스의 이름이고, ‘엘리엇’은 “입에 잘 붙고 발음하기 쉬운 단어”여서 골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딸인 메리 앤을 교육시키기로 결심한 데는 그녀가 남달리 총명해서뿐 아니라, ‘장차 이 아이에게 청혼할 남자가 없을 것 같아서’라는 부모의 현실적 염려가 더 크게 작용했다. 메리 앤에게는 미모를 타고나지 않은 소녀에게 요구되곤 하는 부차적 매력, 예를 들어 사랑스러움이라든지 귀여움 또는 다정다감한 애교 같은 것마저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영특해도 기숙학교를 끝으로 메리 앤은 더이상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결혼 적령기에 도달했으나 모범적인 ‘숙녀a lady’가 되지 못한 메리 앤은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독학을 시작했다. 뉴디게이트 후손들의 신임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사전을 포함해 6777종의 고전 장서를 보유한 아버리홀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메리 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부터 대大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주요 저작들을 탐독했다. 그 치열한 자기교육의 결과로 엘리엇은 호메로스와 볼테르를 대수롭지 않게 인용하고, 그리스 신화와 로마사로 재치 있는 위트를 구사하는 진귀한 여성 작가가 되었다. 

엘리엇의 대표작 『미들마치』가 “최고의 영국 소설 1위”(BBC, 2015),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21위”(《가디언》, 2015)로 꼽히며 후대에까지 높이 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엘리엇이 살아서 그 이름으로 작가적 명성을 획득한 데 있다.

1880년경의 아버리홀. 출처: 위키피디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21위”에 꼽힌 <미들마치>

‘미들마치’라는 가상의 영국 시골 마을에서 1832년이라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주민의 표면과 이면을 꼼꼼하게 서술하는 『미들마치』는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가장 영국적인 소설인 것 같다. 뼈 있는 농담으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강력한 지성과 서늘한 통찰에서 나오는 엘리엇의 스타일에 비하면 괜히 요란하기만 할 뿐 결정적 타격감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메인 서사라 할 만한 것의 비중이 주변적 에피소드들에 비해 특별히 더 풍부하지도 상세하지도 않아서, 어떤 인물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줄거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또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고 보면 글쎄, 세 명인가? 스물두 명인가?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빅토리아시대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읽는다면, 이것은 서너 커플 예닐곱 남녀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비평가들이 이 소설의 주제로 ‘1차 선거법 개혁’과 빅토리아시대의 정치사회 의식의 변화, 전통으로서의 기독교와 실증주의적 유물론의 대결, 상속을 대체하는 경제적 자립 수단으로서 직업의 탄생 등을 꼽는다는 것은, 그게 설령 결혼 이야기처럼 보일지라도 로맨스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미들마치』에는 경구로 외웠다가 적시에 던진다면 훌륭한 일침이 될 만한 주옥같은 문장들이 차고도 넘친다. 사실은 너무 많아서 밑줄을 긋다 보면 그냥 책 전체에 줄을 그어야 할 지경이다. 결국 줄 긋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읽다가 불현듯 이런 의문이 든다. 엘리엇은 정말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이해한바, 그녀는 우리 인간들이 “요령부득의 생쥐가 닥치는 대로 깨물거나 판단하는 것과 비슷”하게 각자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결과는 종국에 어디로 이어질지 대부분 알지 못한 채로, 끊임없이 가고 있다고 믿는 어떤 방향을 선택하면서, 그렇게 힘써 인생을 살다 간다, 라는 진실을 말한다.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 출처: 위키피디아

고전을 읽을 때 여성인 독자가 느끼는 심정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며 즐기고자 하는 늠름한 중립불편의 정신”으로 쓰인 탓에 『미들마치』는 당대에는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다. 그렇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엘리엇이 보기 드물게 박학한 여성이었기에 쓸 수 있었던 글쓰기 방식이 아니었나 추측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이 정도의 지성과 진취적 시각을 갖춘 남성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 현실의 어떤 영역에서건 지도자적 인물로 활동하기에 매진하느라 이토록 관조적이고 성찰적인 소설 쓰기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의 글에서는 무수한 고전을 탐독하면서 여성인 독자에게는 기대되지도 요구되지도 않았던 탁월한 혜안을 갖게 된 한 인간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고전을 읽을 때 여성인 독자가 느끼는 심정이기도 하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서로 얽히고설킨 같은 환경 속에서, 때때로 닥치는 같은 고난들을 겪으며, 동종의 본성에 따라 더듬어가는 인생이라는 의식 말고는 없는,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이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인간으로서 읽고 있을 뿐이다.


※ 이 게시물은 <평균의 마음: 저마다의 극단을 사는 현대인을 위한 책 읽기>(이수은 저)의 본문 내용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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