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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엿보기: 한국사 영화관 4]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사람들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19. 2. 8.

이 글은 '36편의 영화로 읽는 교양 한국사' <한국사 영화관>(전 2권)을 재구성한 포스팅입니다. 총 4회에 걸쳐 전근대, 근현대 한국사를 간략하게 훑어보겠습니다!

1960년 4.19혁명×<효자동 이발사>

한국 영화계는 그간 현대사의 굵직한 일들을 영화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60년 4・19혁명에 대한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없다. 2004년에 개봉한 〈효자동 이발사〉(감독 임찬상)가 주인공의 인생을 따라가면서 4・19혁명 속의 주인공을 다소 희화화하여 다룬 것이 거의 유일하다. 〈효자동 이발사〉는 이승만 독재기를 거쳐 4・19혁명을 다루지만, 영화의 전반적 배경은 5・16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 치하 18년간이다. 청와대와 가까운 효자동에서 이발소를 하던 주인공 성 한모가 대통령 박정희의 머리를 깎으면서 겪는 아이러니한 일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효자동 이발사〉의 전반적 배경은 5・16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 치하 18년간이다.

4・19혁명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2년간 부정한 방법으로 독재한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민적 항거였고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승리한 민주주의 혁명이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52년 한국전쟁 중에 국회의원을 통한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무리하게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했고,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헌법으로 대통령은 2회까지 연임이 가능했기에 1954년 이승만은 마지막 임기 중에 있었다.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여당인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이를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인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8표가 나왔다. 개헌에 필요한 찬성표는 재적 인원의 3분의 2인 136이다. 즉 한 표 차이로 영구 집권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당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내놓은 의견이 사사오입이다.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이라는 소수점 이하의 수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니 사사오입하면,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된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마음대로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된 이승만은 1960년 선거에도 출마했다. 당시 이승만에 맞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趙炳玉, 1894~1960)이다. 1960년 1월 말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 등록까지 마치고 갑자기 발병하여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조병옥의 사망으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이 단독 후보로 나온 상태라 사 실상 무의미해졌고, 결국 선거는 부통령을 뽑는 선거전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3월 15일에 치른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며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킨다. 결국 더는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3월 15일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정부가 이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金朱烈, 1943~1960)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신으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4월 19일에는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총궐기해 “이승만 하야!”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망자가 100명, 부상자 450명에 달했다. 

4・19혁명에 참여한 여학생 시위대. ⓒ경향신문

국민들은 정부의 진압이 강해질수록 더욱더 분노했고, 시위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일반 시민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지도자급 인물들도 시위에 동참하여, 4월 19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1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광주민주화운동×<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2017년 개봉, 감독 장훈)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로, 당시 광주의 비극 속으로 들어간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와 그의 취재를 도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힌츠페터는 다른 외신 기자들보다 빨리 한국에 입국하여 1980년 5월 20일 광주로 잠입한다. 힌츠페터 혼자 입국했다고 나오는 영화의 설정과 달리, 녹음 담당 기자 헤닝 루모어와 함께 였다. 즉 당시 광주에 내려간 독일 방송기자는 두 명이고, 이들을 광주까지 데려간 사람이 김사복이다.

길고 암울했던 유신 독재 정권이 박정희 총살로 자멸한 1979년 10월 이후, 오랫동안 바라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1980년의 봄은 잔인했다. 당시 박정희 총살 사건을 조사하던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의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 1931~)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국민들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유신 독재의 종말을 자신들이 권력을 탈취할 기회로 삼았다. 1979년 12월 12일, 이들은 오늘날 12・12사태로 불리는 군부 내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박정희 정권의 군 세력과 구분하여 이들을 신군부라고 부른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포악한 군홧발은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짓밟고 입을 틀어막았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공포로 제압하기 위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를 고립시키고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광주 사람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지 누명을 씌웠다. 대한민국 사람 중 누구도 광주 시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제대로 알 수 없으며 알았다 해도 알릴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을 보낸 그때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가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진실을 세계에 알렸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는 시민군. 출처: 5・18기념재단

힌츠페터의 취재는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큰일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 언론이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취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군부로부터 탄생한 5공화국 정권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날조했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취재 필름은 신군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 어떤 증거보다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두 차례에 걸친 광주 취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SUDKOREA am Scheideweg>은 훗날 민주 인사들이 몰래 한국으로 들여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상영되었고, 이를 계기로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를 뒤늦게나마 본 사람들은 광주의 참상에 분노했다. 그리고 광주가 우리 현대사에 남긴 메시지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기로에 선 한국〉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항쟁×<1987>

 

영화 〈1987〉은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서 고문을 받다 죽은 대학생 박종철(朴鍾哲, 1964~1987, 여진구 분) 고문치사 사건에서 시작한다. 수배 중이던 대학 선배 박종운(朴鍾雲)의 행방을 쫓던 수사관에게 연행된 박종철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짓밟고 권력을 손에 넣은 전두환 정권은 7년여간 수많은 민주 투사들을 불법 연행하고 고문했다. 이 시기의 죽음 가운데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가 수두룩했다. 수사 당국은 박종철의 죽음도 그렇게 묻으려 했다.

영화 〈1987〉에서 박종철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부친 박정기(김종수 분).

당시 정권의 광기 어린 억압과 횡포는 임계점을 넘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독재 정권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한 본능적 거부 반응과 양심 덕분에 세상에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사체를 본 의사, 사체 보존 명령을 내린 검사, 부검에 참여한 검사, 국과수 부검의, 사건을 보도한 기자 들이 질식할 것 같은 사회 분위기에 숨통을 틔우듯 차례로 저마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잇따른 양심선언으로 박종철이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을 숨기기 어렵게 된 경찰은 고문 주체가 조한경(趙漢慶, 박희순 분)을 비롯한 수사관 두 명이라고 서둘러 발표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또 시신을 급히 화장하며 증거를 인멸했다. 실제로 박종철을 고문한 수사관은 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다. 당시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朴處源, 김윤석 분)에게 거액을 받고 두 명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다. 이런 진실은 두 사람과 같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민주화 운동가 이부영(李富榮, 김의성 분)을 통해 밝혀진다. 그는 영화에서 한병용(유해진 분)으로 그려진 교도관 한재동, 전병용을 비롯해 도피 중이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金正男, 설경구 분)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金勝勳) 신부에게 전하면서 세상에 알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에 대한 세상의 분노는 컸다. 그리고 이 분노가 당시 국민적 열망이던 개헌 문제와 연결되면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분출된다.

1987년 6월 9일, 다음 날 열릴 ‘6・10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신촌 연세대 앞에서 열린 시위 도중 이한열은, 전투경찰이 ‘조준 사격’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만 스무 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박종철에 이어 전두환 독재 정권의 폭압성과 잔혹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람들은 또 다른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도도한 역사의 물결에 동참한다.

1987년 7월 9일 열린 이한열 열사 영결식. 제공: 국가기록원

시위는 6월 10일 이후 20여 일 동안 매일 계속되었고 급속도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독재 정권의 압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민주화 운동을 애써 외면하던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터트렸다. 결국 6월 29일에 전두환 정부가 국민에게 굴복했다. 대통령 직접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금된 민주 인사들의 석방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2018년 현재 대한민국 헌법이 바로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개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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