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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엿보기

[책 엿보기: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3] 독재에 부역한 어느 지식인 이야기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20. 7. 9.

문학의 우상을 파괴하다

 

이번에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Nocturno de Chile』을 보겠습니다. 볼라뇨는 ‘마르케스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 스페인어권 세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소설가, 라틴 아메리카 최후의 작가’라는 칭송을 받는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칠레의 밤』은 근래 제 독서 체험 중 가장 큰 감동과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문학이 죽어 가는 시대에 다시 한 번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게는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볼라뇨는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자기를 유지하는 방법, 특히 정치 및 역사와 연결되었을 때 문학과 문학가가 어떤 기능을 맡는지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있던 모든 문학의 우상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문학이라는 이념 또는 제도를 철저히 파헤치는 작업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지만 볼라뇨는 그 금기에 도전합니다. 이것이 볼라뇨 문학의 본령입니다. 

로베르토 볼라뇨. 출처: http://bit.ly/2Zei0cC

피노체트 군부독재하의 칠레를 배경으로 한 소설

 

1970년에는 급진적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정식 선거를 통해 칠레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대규모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펴면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습니다. 결국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 저항하다 자살합니다. 그 뒤 너무도 잘 알려진 피노체트의 철권통치가 이어집니다. 피노체트는 16년 동안 독재를 했습니다. 피노체트 독재하에서 고문당한 사람만 해도 수만 명에 이르고 학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도 수천 명이라고 합니다. 『칠레의 밤』은 아옌데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피노체트 군부가 칠레를 장악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칠레라는 국가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소설입니다. 

16년간 철권통치를 한 피노체트. 출처: 위키피디아

신부이자 지식인 이바카체의 임종 침상의 독백 

 

『칠레의 밤』은 스타일 면에서도 상당히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흐름으로 독백이 이어지는데, 이 형식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임종의 침상에서 독백이 이어지다 마지막에 죽음으로 진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룻밤 정도의 시간 같아요. 독백의 주인공은 문학비평가로서 필명이 있는 신부죠. 본명은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 비평할 때 쓰는 필명은 이바카체입니다. 시를 쓸 때는 본명을 밝히는데, 필명이 본명보다 더 유명해집니다. 남미에서 신부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주인공은 문학비평가로서 명망까지 높은 사람입니다. 칠레에서 그를 거치지 않으면 문학적 명성을 얻기 힘들 만큼 권력가죠.  
주인공의 직업은 신부예요. 신부가 어떤 일을 합니까? 신이라는 절대선 또는 절대 진리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죠. 한편 그는 위대한 문학비평가입니다. 문학비평가는 또 어떤 일을 합니까? 어쩌면 당대에 가장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임무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신부이면서 지식인인 이바카체가 칠레의 정치 상황 속에서 평생 어떻게 살았는지를 고백합니다. 하지만 볼라뇨는 이 사람이 끝내 자기기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행동하기를 멈추고 고전으로 숨어든 지식인  


이 작품에 이바카체를 결정적으로 기호화하는 시니피앙이 나오는데 바로 ‘팔꿈치’입니다. 맨 앞 장에서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 (…) 기억을 낱낱이 더듬어 보련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외부에서 혼란스러운, 비극적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바카체가 하는 행동이 ‘팔꿈치 괴기’입니다. 임종의 침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행동은 자기기만입니다. 신의 진실과 문학의 진실을 위해 당연히 행동해야 할 때 이바카체는 도리어 안으로 들어가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 그리스 고전을 읽습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볼라뇨의 문제 제기입니다. 칠레 지식인들이 이렇게 살아왔다는 말이죠.

 

위에서는 문학 파티를 벌이고,  
지하에서는 고문을 자행하다 

 

『칠레의 밤』은 실제 문학과 정치의 거물들을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그중 압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고문장 위에서 벌어지는 문학 파티죠. 문학 파티가 벌어진 저택의 안주인이자 작가인 마리아 카날레스는 미국인(칠레 비밀정보국 요원) 남편과 두 아이와 살면서 교외의 넓은 저녁에 예술가들을 초청해 파티를 열어요. 파티가 열리는 저택 지하실은 정치범을 고문하는 장소입니다.  
문학 파티 장소가 칠레 국가 정보국 핵심 인사의 집이었으며 그 지하에서 칠레 반체제 인사들이 전기 고문을 당한 것이 나중에 밝혀지죠. 마리아 카날레스와 아이들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가끔 전기가 나갔는데, 고문 때문이었던 겁니다. 어느 파티 때는 만취한 전위 연극 이론가가 화장실을 찾다가 지하실에 방치된 고문당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파티에 합류하죠. 그 뒤 지하실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문학 파티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과 이바카체도 이 상황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바카체는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자애로이 감추어 버린 것을 무엇 때문에 들쑤신단 말인가?”(147쪽) 하고 말합니다. 이게 이바카체 삶의 논리입니다. 자기 정당화예요. 굳이 파헤쳐서 뭐하겠냐는 겁니다. 

피노체트 독재 시절 229명이 희생된 칠레판 아우슈비츠 ‘비야 그리말디’. 출처: http://bit.ly/2KRH3x3

그러나 아무리 억눌러도 때가 되면 눈을 반짝 뜨고 살아나는 늙다리 청년(이바카체의 양심을 상징), 소설에서 유일하게 분노의 시선을 가진 어린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 힘겹게 살아온 하층 농민도 있어요. 이 모두가 칠레적인 것입니다. 이바카체는 마지막까지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고 하겠지요. 그는 그저 지식인이나 문학평론가 한 명이 아니라 칠레 문학을 상징합니다.

 

시체로 떠오른 진실 

진실이 차츰차츰 시신처럼 떠오른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혹은 낭떠러지 밑에서 떠오르는 시신. (…)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155쪽

‘지랄 같은 폭풍’이란 곧 죽음이 덮쳐 온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 발견하고 만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살아 있는 진실이 아니라 시체로서 진실입니다. 전형적 임종이라면 살아 있는 진실을 만나야 하지만, 볼라뇨에게 임종의 침상은 시체가 된 진실을 만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아요. 이바카체처럼 역사의 허무주의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기만하고 양심을 질식시킨 지식인은 임종의 침상에서도 결코 살아 있는 진실을 만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죽은 진실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가열한 문학적 저주입니다. 칠레의 지식인, 문학인에 대한 경고, 메멘토 모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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