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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엿보기

[책 엿보기: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2] 뒤늦게 관능에 빠져버린 어느 대소설가의 최후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20. 7. 8.

일흔네 살 괴테, 열아홉 소녀에게 빠지다


독일 문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대문호 괴테. 그가 일흔네 살 때 울리케라는 열아홉 살 소녀에게 빠져 청혼까지 합니다. 집안사람들이 반대하니까 친분이 있는 성주에게 중매를 부탁하죠. 성주가 중매하면 문제가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마리엔바트의 괴테’라는 말이 생겼어요.  

이번에 살펴볼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베니스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은 원래 제목으로 ‘마리엔바트의 괴테’를 쓰려고 했답니다. 마리엔바트는 괴테가 울리케를 만난 온천 휴양지의 이름이죠. 토마스 만 스스로 말년의 괴테가 주인공 아셴바흐의 모델이라고 했거든요.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문학으로 해소한 토마스 만


그런데 토마스 만이 죽을 때 자신의 일기를 20년 뒤에 공개해 달라고 했고, 아카이브에서 이를 따릅니다. 최근에 일기가 공개되었는데, 그가 동성애자로 밝혀지면서 만에 대한 연구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만이 철저히 가면극을 한 셈이에요. 진리와 시민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문학적으로 감추고 해소하는 가면극 말입니다.
  
토마스 만의 문학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내용뿐만 아니라 글쓰기 방식이 논쟁을 불러일으켰어요. 그야말로 완벽할 만큼 교과서에 실리기에 좋은 전형적 글쓰기 방식이죠. 서사문학을 완성하려는 의도 때문에 읽기에 지루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구성과 표현과 주제 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조화로운 작품으로 꼽히고, 실제로 읽어 보면 빈틈이 없습니다.

토마스 만. 출처: 위키피디아

정신의 완성을 구현해낸 소설가, 아셴바흐


주인공 아셴바흐는 엄청난 지성의 힘으로 자기 삶을 구축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마치 신체성은 없이 정신적으로 구현된 사람처럼 표현되죠. 그는 젊은 시절부터 극도의 규율로 자신을 자제해왔고, 초인적인 의지와 자기 관리, 끈질긴 근성과 도덕성의 대명사로 아주 명망이 높은 소설가예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중년의 소설가 아셴바흐가 베니스에서 만난 열네 살짜리 미소년 타치오에게 빠져들어 결국 죽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뮌헨에 살던 아셴바흐가 어느 날 오전에 작업을 하다가 몹시 피곤한 상태로 산책에 나섭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공동묘지 납골당에 가죠. 거기서 아주 이상한 사람을 만나요. 빨간 머리에 피부는 주근깨가 섞여 있고 깡마른 체구에 수염도 없는 남자죠. 말하자면 납골당에서 죽음의 사자를 만난 겁니다.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충동을 느낍니다. 그리고 베니스로 여행을 가죠. 베니스 호텔에 도착한 뒤에 미소년 타치오를 만나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1971년 작)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타치오를 바라보는 아셴바흐. 출처: http://bit.ly/2KPMInk

열네 살 미소년에게 매혹된 대소설가

 

아셴바흐는 소년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걸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창백하면서도 우아함이 깃들이고 내성적 면모가 보이는 얼굴은 연한 금발머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술, 우아하고 신성한 진정함이 어린 표정을 담은 그의 얼굴은 가장 고귀했던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연상시켰다. -451쪽(<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삼환 옮김, 민음사)

 

타치오는 완벽한 신체미가 있죠. 죽음과 신체와 아름다움이 하나로 겹쳐진 존재예요. 아셴바흐는 자신이 추구해온 정신적 아름다움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타치오에게서 발견합니다. 그후부터 점점 타치오에게 끌려들어가죠. 보기만 하다가 말을 걸고 싶어집니다. 그다음에는 타치오의 어깨에 손을 대고 접촉하고 싶어 해요. 나중에는 절망적으로 외치죠. 견딜 수 없게 사랑한다고요.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인 타치오의 아름다움 앞에서 아셴바흐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면서 소멸할 수밖에 없는 자기 신체를 회생시키기 위해 절망적으로 노력합니다. 이발소에 가서 치장을 하잖아요.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죠.

 

몰락의 이야기인가, 예술미를 완성하는 이야기인가


보통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아주 높은 지적 작업을 완성한 사람이 열정이나 도취라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우연히 빠지면서 스스로 명예를 실추하는 치욕적 이야기로 읽습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몰락의 이야기’가 사실은 만의 건강한 예술미가 완성되는 과정입니다. 만은 결코 아폴론적인 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갖고 들어가지 않아요. 끌려들어 가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다시 아폴론적인 것에 포함시켜서 아폴론적인 것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만이 지향하는 예술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날 아셴바흐가 타치오의 치아를 보고 충격에 빠지죠. 

그는 타치오의 치아가 그리 만족스런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빨 끝이 좀 뾰족하고 창백한 데다가 건강한 치아에서 볼 수 있는 광택도 없었으며, 가끔 빈혈증 환자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치아가 이상하게도 호감을 주지 않는 투명한 색이었다. -465쪽

왜 충격에 빠질까요? 치아 때문에 타치오가 ‘어딘가 아픈 것 같고’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완벽한 조형미를 갖추었다고 생각한 타치오가 예술적 형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를 가진 걸 인식하는 겁니다. 신체인 이상 ‘소멸’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완벽한 조형미는 신체성이 제거되어야 가능하잖아요? 

 

타치오의 유한성을 대신 끌어안고 죽다

 

타치오를 만지고 싶고 그에게 융합되고 싶은 욕망이 방탕한 마음인데, 한편으로 순수하게 염려하죠. 순수한 염려는 타치오가 죽으면 안 된다는 마음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어떻게 신체가 소멸되지 않은 상태로 정신과 만나서 영원히 불멸의 정신적 아름다움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신체 속에 있는 소멸의 치아를 타치오로부터 빼내면 되죠.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렇잖아요. 빼 버리는데 누군가가 대신 그 치아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타치오의 치아는 영원히 타치오에게 종속되고 타치오의 유한성은 여전한 겁니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어요. 

궁극적으로 아셴바흐가 죽어가는 과정은, 타치오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타치오의 썩어갈 수밖에 없는 치아를 대신 먹는 과정입니다. 나중에 해변에서 아셴바흐가 죽어 가죠. 그때 아셴바흐는 타치오가 영원한 에로스의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자신을 불러들이는 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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