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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엿보기-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새로운 시대, 생활을 실험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저자 이토 히로시 인터뷰 1회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15. 8. 15.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의 저자 이토 히로시가 <겐다이비즈니스>와 한 인터뷰를 네 차례에 걸쳐 올립니다. 저자 이토 히로시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 생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새로운 노동방식에 대한 생각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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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지 『겐다이비즈니스(現代ビジネス)』  2012년 12월 16일
요네다 히로히코의 <새로운 시대, 생활을 실험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시리즈 대담

 

"내 힘으로 내 '생업'을 만든다

ㅡ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시와의 대담

 

제1회

 

 

인터뷰어 : 요네다 히로히코(米田智彦)
1973년생. 출판사 근무를 거쳐 프리랜서 편집자 및 출판 기획자로 활동 중. 출판 외에 웹기획과 소셜미디어 기획, 이벤트 기획 등의 일을 하고 있다. 2011년 약 1년간 생활실험기획 '노마드 도쿄'에서 주소지를 갖지 않고 소셜 미디어에서 만난 인연에 의지하여 도쿄 각지의 셰어하우스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살면서 그 체험을 트위터와 유스트림 등으로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저서로 『앞으로 기대되는 서른한 사람을 만나러 가다』 『유스트림 비즈니스 응용 핸드북』 등이 있으며 유료 메일 매거진 『도쿄 유동일기』도 발송하고 있다.

 

인터뷰이 : 이토 히로시(伊藤 洋志,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 저자)
1979년생. 가가와 현 마루가메 시에서 성장하였으며, 교토 대학 농학연구과 삼림과학전공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대학원 졸업 후 네 명의 신입사원으로 이루어진 벤처기업에 참여했다가 스트레스로 결국 퇴사하였다. 이후 『증간 현대농업』(지금의 『계간 지역』) 등의 프리랜스 기자로 활동을 하였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여행, 제빵, 웨딩, 임대, 숙박, 판매, 목공에 관련된 7가지 크고 작은 일을 벌여, 이를 게릴라식으로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현재 셰어오피스 ‘스튜디오 4’와 집 한 채를 전부 임대하는 교토의 숙소 ‘고킨엔(古今燕)’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몽골 진짜배기 생활체험 투어’ ‘시골에서 장작가마로 굽는 빵가게 열기’의 기획 운영, 산골 할머니들이 직접 만든 생화 장식 ‘하나아미’의 판매를 돕고 있다. 세미프로페셔널 목수 집단 ‘전국마루깔기협회’와 콘크리트 담을 해머로 직접 해체하는 ‘콘크리트블록 담 해머해체협회’ 등 생업식 길드 단체 설립 활동도 하고 있다. 저서에 『고향을 만들다』(공저)가 있으며, 『작은 장사를 시작하는 방법』을 감수했다. 생업 웹사이트 http://nariwai.org

 

 

자기가 자기 일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웬만하면 DIY로
게다가 일을 하나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사람

 

 

요네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연재 대담 '생활을 실험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다' 그 두번째 시간입니다. 게스트로 올해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를 출간한, 웹사이트 '생업'(http://nariwai.org)의 대표인 이토 히로시 씨를 만나보겠습니다.

 

이토: 안녕하세요.

 

요네다: 제가 이토 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는 '3.11(동일본대지진)'이었습니다. 2011년 '노마드 도쿄'라는 생활실험기획을 통해 주소지를 갖지 않고 도쿄를 돌아다니며 산 적이 있는데요, 그때 이토 씨가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 '스기코 하우스'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이토: 셰어하우스라는 이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일반적인 룸셰어, 그러니까 룸메이트와 방을 같이 쓰는 집이에요.

 

요네다: 그러던 중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틀 정도만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어야만 할 것 같았어요. 결국 그 이후 며칠 더 묵게 되었습니다.

 

이토: 그랬죠. 일주일 정도 계셨던 것 같네요.

 

요네다: 저는 그해 1월 11일부터 생활실험기획을 시작했는데 정확히 2개월 만에 대지진이 일어나 '노마드 도쿄'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집을 버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토 씨네 셰어하우스에 머물면서 지진을 같이 겪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만난 적이 있죠. 그때 이토 씨가 하고 있는 '생업'이라는 활동에 대해 알았고 무척 개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일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웬만하면 DIY로 만든다, 게다가 일을 하나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한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는 사람이 정말 있구나 싶어서 놀랐습니다. 그럼, 여기서 '생업'이라는 활동을 시작한 계기를 다시 얘기해주시겠어요?

 

이토: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저는 가가와 현에서 자랐는데 취직을 하려고 구직 사이트에서 가가와 현의 일자리를 찾아봤더니 은행이나 전력회사에 취직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지역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다'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일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네다: 교토 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다니셨죠?

 

이토: 네, 석사 과정까지 했어요.

 

요네다: 대학에서는 삼림과학을 전공하셨던데요.

 

이토: 이른바 임업이라는 걸 배웠는데요, 이게 또 취직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환경 문제를 공부하려고 들어갔는데 '이 과는 옛날에 임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어요.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임업을 공부하면 취직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요. 주택건설회사에 들어가는 정도죠. 몇 군데 회사에 취직하려고 하면서 제가 이상으로 여겼던 일은 찾지 못했고 ‘그렇다면 만들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부는 농학부였기 때문에 일본 농촌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미야모토 쓰네이치(민속학자)나 아미노 요시히코(역사학자)의 책을 읽었어요. 그러면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 흥미로운 생활을 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더 오래된 옛날 문서를 읽어보기도 했는데요, 거기에서 농민들이 단체로 '농한기에는 온천 같은 곳에 가고 싶습니다'라는 신청서를 관리에게 제출하기도 하는 등, 의외로 장기 휴가를 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어요. 물론 당시는 아직 농업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힘들었을 테지만 옛날 일본 사람들은 일을 몇 개씩 하면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원래 이렇게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업도 전후에 거품이 생겨서 전국적으로 삼나무를 심은 결과, 지금은 채산이 맞지 않아 힘들게 되었는데요, 원래 임업을 전업으로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전업으로 해서 채산이 안 맞는 건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죠.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에 관한 표준적인 관념이 좀 왜곡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를 보았을 때 일을 몇 개씩 하면서 생활을 꾸려가는 쪽이 오히려 표준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고도 경제 성장의 결과는 극단적인 분업화
많은 사람이 몇 가지 산업에 종사하는 회사원이 되어야 하는 시대,
니트(NEET)는 개인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회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된 것뿐

 

 

요네다: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일본 봉급생활자 사회에서 고정화된 사고방식이고, 실은 이게 전후, 즉 최근 50~60년 사이에 생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죠?

 

이토: 맞아요. 오늘날 일본은 특수한 경우이고 그다지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고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전업화, 즉 극단적인 분업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버블이 붕괴하고 계속 불경기라는 뉴스만 들으면서 자랐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의 경기가 특수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예전 같은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전업화가 아니라 몇 가지 일을 같이 하는 것이 건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네다: <작고 소박한 나만의 생업 만들기>에도 쓰신 건데요, 다이쇼 시대에는 다양한 일이 있었는데 전후에 그 수가 크게 감소했더군요.

 

이토: 당시 자료에 따르면 3만 5천 종이나 되는 직업이 나와요. 통계를 내는 방법이 변하기는 했겠지만 지금은 2천 종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줄었어요.

 

요네다: 그건 전후에 '전업'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었기 때문인가요?

 

이토: 그렇다기보다 '회사원'이라는 형태로 변했기 때문이겠죠. 옛날에는 예를 들면 '담뱃대 수리'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요네다: 담뱃대 수리만 전문으로요?

 

이토: 그런 식으로 다들 작은 일 여러 개를 했다고 생각해요. 농민이라고 하지만 농업만 했던 사람은 없었어요.

 

요네다: 농가에서도 차남이나 삼남은 장사나 행상을 시작하기도 하는 등 원래 일본에서도 횡단적으로 일을 해왔던 거군요.

 

이토: 맞아요. 돈이 없으니까 '그럼 놀이판이라도 벌려볼까' 하면서 사자춤을 추며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았던 지역도 있었던 것 같아요.

 

요네다: 그러다가 가부키 같은 전통 예능이 탄생한 거니까요.

 

이토: '일이란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것들을 하면 그만이다'라고 소박하고 순수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요네다: 하지만 이토 씨도 일단 취직을 하자고 생각했었죠?

 

이토: '일단 경험해보자'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해보자고. 일본의 신규 대졸자 취직은 세계에서도 드문 문화이니까 다른 나라에 필드 조사를 나간다는 마음으로 구직 활동을 했어요. 물론 떨어지면 그만큼 우울했지만요(웃음), 그래도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결국 큰 구인구직 서비스 회사와 ‘구인잡지를 창간’하려는 회사 두 곳이 남았는데, 생각해본 결과 '어찌 되었든 내 힘으로 일을 만들기로 했으니까 오래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싶어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신생 회사를 선택했어요. 그 당시 이미 니트(neet)가 문제가 되어서 니트는 게을러서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저는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면 적당한 일을 여러 가지 했던 시대로부터 같은 일을 주 5일, 매일 8시간 한다는 식으로 바뀐 것은 불과 몇십 년 사이의 일이니까요. 매우 급격한 변화였으니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 없어요. 그러니까 다른 식의 일을 만들어야만 해요.

 

요네다: '회사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모든 일본인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 씨의 생각이로군요.

 

 

환경문제에 관심 있어 들어간 농학부, 취직 자리 없어
2000년대 초반 벤처붐 때 벤처기업에 취업

 

 

이토: 니트가 문제라며 떠들고 있지만 이는 노동방식이 너무 축소되어 거기 맞지 않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된 것뿐이에요. 그걸 두고 '게으르니까 나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대책이라고 나온 게 저희가 대학생이었을 때 '니트를 훈련시켜 기업에서 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죠.

 

요네다: 직업훈련소 같은 거였죠.

 

이토: 맞아요.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다는 노동방식 자체가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직업훈련을 시켜봐야 별로 효과가 없을 거예요. 새로운 형식의 소상업을 만들어야만 해결될 것이고 직업훈련에 관한 예산도 낭비되지 않을 것 같아요.

 

요네다: 하지만 그 '새로운 형식의 소상업'을 대학원을 졸업한 스물넷의 이토 씨가 어떤 식으로 상상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네요.

 

이토: 그게 참 신기한 게, '새로운 소상업을 만들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여러 경험을 쌓는 와중에 단편적으로 힌트를 얻게 되었어요. 책을 읽고 경험을 쌓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한다'라든가 '고객 제일주의를 벗어나 고객과 사업자가 대등해야 한다'든가, '쓰레기를 늘리지 않는 일이 좋다' 등 지금의 생업에 중요한 키워드들을 하나씩 찾아나가게 됐어요.

 

요네다: 신규 대졸자로서 취직한 곳이 벤처기업이었죠?

 

이토: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인구직 서비스 회사에서 구인매체를 창간하는 신규 서비스를 만들게 됐어요. 벤처기업이라고 하면 화려할 것 같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요, 전혀 멋있는 곳이 아니었어요(웃음).

 

요네다: 2000년대 초반은 '벤처'라고 하면 아직 뭔가 멋있어 보이던 때였죠.

 

이토: 저도 경험이 없었으니까 벤처 기업이 어떤 곳인지 몰랐어요. 가 보니 아파트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 책상이 주욱 놓여 있고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르겠지만 삼각김밥을 닮은 구형 아이맥이 있고…… 프린터도 각 컴퓨터에서 공유해 쓰지 못했어요. '벤처 기업이란 이런 곳이었구나' 싶었죠.

 

요네다: 듣기만 해도 힘들 것 같은 회사네요(웃음).

 

이토: 하지만 당시에는 회사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매달 20만 엔 정도 월급을 받고 창업에 도전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어요.

 

요네다: 수업료 같은 걸 스스로 설정했던 거군요.

 

이토: 생활을 보장받고 창업의 밑천이 될 만한 돈을 누군가 내준다는 의미에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비즈니스이고 뭐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에요. 직원은 네 명이었어요. 그 인원으로 잡지를 창간하기로 했죠. 그 업무 외에도 매출 관리며 상표 등록이며 구인 사이트 개설도 해야 했고요. 잡지 창간도 기획을 해서 편집 프로덕션을 찾고, 구인광고 게재 요금을 설정해서 영업을 했어요. 영업이라고 해도 될 만한 것은 다 하는 거예요. 다이렉트 메일을 작성해서 반응을 보기도 하고 전화 영업도 하고 방문 영업도 하고... 정말 막무가내로 일한 거죠. 광고를 따낸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무가지이니까 배포처를 확대하기 위해 전국의 특성화 고등학교에 전화를 해서 배송 준비를 하고 자격증 시험장에 가서 배포도 했어요.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목적에 따라 모든 수단을 다 찾아보고 실행했어요. 저희가 만든 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과위생사 구인 잡지였어요. 그러니까 뜻은 참 좋았죠. 치과위생사는 치아 예방의료 전문가들이니까 모두 예방의료를 전파한다는 생각으로 일해요. 그러니까 '앞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취직을 결정한 것도 있었어요.
환경문제에 흥미를 가지고 농학부에 들어가면 이상적인 취직 자리가 없어요. 식품회사 같은 곳은 농학부에서 갈 만한 곳이지만 막상 들어가면 '배운 것과는 참 다르구나' 싶은 상황에 빠져요. 일종의 이상주의를 갖고 있으니까 '냉동식품은 식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돼요(웃음). 그런 걸 지나치게 고집하면 취직할 곳이 없죠.

 

요네다: 아, 진정한 친환경주의자가 되면 취직할 기업을 고르는 데 애를 먹겠네요.

 

이토: 네, 친환경적 사고가 쓸데없이(?) 커지면 취직할 곳이 없어져요. 물론 편견도 있겠지만요.

 


대기업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지면 남는 건 NPO, NGO
NPO, NGO에 뜻이 있어도 너무 박봉
사명감만으로 계속 일하기 힘들어

첫 직장에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전력을 다해 일했지만 

스트레스 심해 피부병 얻어

 

 

요네다: 대기업이 선택지에서 사라지면 NPO나 NGO밖에 안 남잖아요.

 

이토: 네, 하지만 그런 단체에도 취직할 만한 자리는 별로 없어요. 게다가 2004년 당시 NPO는 정말 박봉이었으니까요.

 

요네다: 분명 NPO나 NGO에 뜻을 두고 취직을 했더라도 계속 일하기는 힘들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들려왔죠.

 

이토: 사명감만으로 일을 한다는 건 어렵죠.

 

요네다: 뜻과 사명이 숭고한 만큼 월급이 적은 것에 불만을 말할 수 없는 거죠. 한 달에 10만 엔쯤 받고 일하다가 2년 정도 지나면 피폐해져서 시골로 돌아가거나...

 

이토: 저도 이것저것 조사해보다가 '여기도 안 되겠다, 저기도 안 되겠다' 싶은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내 힘으로 일을 만드는 첫걸음으로서 우선 취직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전공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제가 취직한 회사가 추구하는 바는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죠.

 

요네다: 이른바 ‘사회 공헌’도 포함한 비즈니스를 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 것인가요?

 

이토: 하지만 실제로 취직을 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선 어떤 고객, 어떤 협업 상대를 고를 것인지, 일반적으로는 어떤 사람들과 접하게 되는지 저로서는 이런 부분을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영업을 나가면 치과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낮에는 당연히 바쁜 분들이에요. 일을 하는 도중에, 예를 들어 휴식 시간에 '이런 상품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들 거북하게 여길 뿐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 돈이 없으니까 전철에도 광고를 내지 못하고 게릴라 식으로 영업을 했는데, 예를 들어 치과 병원에 상품 광고 팩스를 넣으면 사무실로 항의 전화가 걸려오는 일도 종종 있었어요. '당신들 바보냐, 왜 멋대로 팩스를 넣느냐'라고 화를 내요. 그럴 때는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죠. 속으로는 '네, 저도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무조건 사죄를 해야만 상황이었어요.

 

요네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잡지 등 매체를 창간할 때에는 창간 준비호와 창간호에 광고가 들어가긴 하는데 기본적으로 광고 수입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임시 광고'라고 하는데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잡지에 광고료를 지불할 기업은 거의 없으니까요.

 

이토: 저희는 그걸 정가를 받으려고 했죠.

 

요네다: 그건 정말이지 아마추어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에요(웃음).

 

이토: 어떤 의미에서는 아마추어이니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던 분야에서 어찌어찌 구인잡지를 창간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고민 끝에 <마음을 사로잡는 영업> 같은 영업에 관한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은 안 되더라구요(웃음). 영업을 나가서 '광고 효과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들어도 '아, 처음이라서 모릅니다'라는 말밖에 못하는 거예요. 전국의 특성화 고등학교에 배포한 것만으로도 어찌어찌 되기는 했어요. 구인잡지 자체가 거의 없으니까 '잡지를 그냥 드리겠습니다'라고 말만 하면 많은 고등학교가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걸 허락했어요. 그렇게 해서 110건 정도 광고를 따냈죠.

 

요네다: 110건이라니! 놀라운데요.

 

이토: 젊음이란 무서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환경에, 그런 월급에,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그만큼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에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만큼 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요네다: '일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잘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도 있는 거네요.

 

이토: 그렇죠. 그런 한계를 넘어 전력을 다했어요. 모두 초봄부터 꽤 무리했기 때문에 가을쯤 되어서는 상태가 이상해진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어요. 당돌하게 '잡지에 동물에 관한 칼럼을 싣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요.

 

요네다: 구인 잡지에 동물에 관한 칼럼을요?

 

이토: 읽을거리로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르는 동물을 소개하는 페이지를 만들었어요. 그뒤에 동물을 기르기 시작한 직원도 있었고요.

 

요네다: 그건 치료가 필요한 상태 같은데요. 병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이토: 그렇죠. 동물이라는 자기 나름의 도피처를 만든 것 같은데 '이건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봉급생활자들 힘들게 돈을 벌지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술을 마시거나 비싼 자동차를 사거나 양복을 사기도
소득이 많지만 남는 건 없어
2~30대 직장인들의 전형적인 패턴

월말 카드 명세서를 보면 악 소리

 

 

요네다: 이토 씨는 그런 조짐이 없었나요?

 

이토: 우선, 피부가 거칠어졌어요. 원래 피부가 약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정말 피부가 거칠거칠해서 허연 각질이 만져졌어요. 그리고 역시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잘 못 자서 매일 자기 전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요네다: 왜 하필이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이토: 맛이 진하고 크기랑 가격이 좀 비싸다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때마침 집 옆에 편의점이 있었죠. 애를 쓰지 않으면 전혀 자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저도 모르게 사러 가게 된 거예요. '오늘은 안 사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이불 속에 들어가도 역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집을 나와 편의점에 가서 하겐다즈를 사게 돼요. 이게 매일 반복됐어요.

 

요네다: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라 '하겐다즈의 개' 같은 거로군요(웃음).

 

이토: 맞아요, 거의 조건반사적이었어요.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돈도 거의 모으지 못했고요. 그런 생활을 해보니 야근수당도 거의 나오지 않는 회사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매달 20만 엔 정도를 받을 수 있었어요. 학생 시절에 한 아르바이트를 생각해보면 많이 받는 거죠. 게다가 집은 욕실도 없는 방 두 칸짜리 월세 5만 엔의 싼 아파트이니까 일이 힘들어도 돈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혀 돈을 모으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축을 못했다는 게 충격적이에요. 결국 '일을 해서 받은 월급이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소비로 변하는' 수수께끼 같은 순환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요네다: 그게 일본 봉급생활자한테는 일종의 패턴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돈을 벌어도 스트레스가 너무 크니까 술을 마시거나 비싼 차나 고급 양복을 사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한턱 내기도 하죠. 소득이 많긴 하지만 소비도 많으니까 별로 남는 게 없어요. 비교적 돈을 잘 버는 20~30대 직장인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패턴 가운데 하나죠. 저도 출판사에 다닐 때 그랬어요. 시간도 없고, 잠깐 백화점에 들르면 양복이나 시디 같은 '어른들의 쇼핑'을 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 월말에 카드 명세서를 보면 악 소리가 절로 나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를 방지하려면 소비를 줄이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자체를 없애야 해요. 개인이 느끼는 만족이나 행복과 소비 등의 경제활동의 균형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건강도 생활도 망가지고 저축도 못하고 나이를 먹을 뿐이에요. 이런 현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회사를 다녀보고서야 처음으로 실감하게 됐어요.

 

이토: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생업'으로서 제 일을 만들기보다 우선 회사 의존, 소비 의존에서 독립해야만 했어요. 저는 그저 실직했던 것뿐이지만요(웃음). 한편 저는 운이 좋았던 게 회사에서 일할 때 농문협이라는 출판사가 제 석사 논문을 잡지에 실어줬어요. 장인들 곁에서 견습을 하면서 '제자는 어떻게 길러내고 그들은 독립한 뒤 생계를 어떻게 꾸리는가'를 주제로 썼던 논문이에요. 여러 지역에서 오래 머물면서 공예품 전시 판매 등도 도왔어요. 어쨌든 현장에서 경험을 하면서 조사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가장 재미있었던 곳이 오키나와의 염색 공방이에요. 염색뿐만 아니라 천의 재료가 되는 작물도 재배하고 쌀농사도 짓고 공방도 자신들이 지었어요. 전시회나 워크숍도 하고요. 생활이 즐거워 보였어요. 전통 공예는 요즘 어디나 '젊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상황인데 그 공방에는 늘 두세 명의 젊은이가 연수를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깜짝 놀랐죠. '전통 공예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계자가 없다' 등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상식을 그 공방은 가뿐히 깨고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상식이 깨지는 부분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어요. 불필요한 돈도 쓰지 않았고요.
그래서 '앞으로의 장인들은 소재나 유통을 자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석사 논문의 결론이 됐어요. 그리고 이 논문이 농문협의 『증간 현대농업』(지금의 <계간 지역>)이라는 잡지에 실렸죠. 이 잡지는 농업 비즈니스와는 정 반대 방향에서 '농촌 생활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이 어떤 방법을 찾고 있는가'에 대한 사례를 다각도로 취재하는 매체인데요, 저도 회사를 그만둔 뒤에 잠시 글을 쓰기도 했어요.

 

 

우선 월급 의존, 소비 의존에서 벗어나야
월급 외에 돈을 벌기 시작하면 세계관이 바뀐다

 

 

요네다: 그 잡지 편집부에 들어가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이토: 대학원을 나와 취직을 하려고 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 그 잡지의 편집장이었어요. 그때 그분이 '자네는 활동가라서 여기에 취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훌륭한 어른을 만나는 건 중요한 일이죠.

 

요네다: 하하하.

 

이토: 그 출판사에 들어가면 처음 몇 년 간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잡지를 팔아요. 각 지역의 농촌에 들어가서 잡지 정기 구독 영업을 하는 거예요. 그런 소박한 영업 덕분에 <현대농업>은 많은 정기구독자를 확보하고 있어서 기반이 탄탄한 잡지예요.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시골을 좋아하니까 지역을 도는 사이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회사를 그만두기도 해요. 자기 농업을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편집부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요. 일을 하면서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요. 그래서 '전에 근무하던 직원을 취재하는' 일의 순환이 생기기도 하죠(웃음).

 

요네다: 정말 훌륭한 순환시스템이네요.

 

이토: 거기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다음, 앞서 말한 벤처 기업에 들어갔다가 모든 사원이 피폐해진 시기에 그 편집장님에게 제 석사 논문을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이거 재밌으니까 싣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읽기 쉽게 고쳐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결국 제 원고가 잡지에 실리고 원고료로 6만 엔 정도를 받았어요. 그래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었죠(웃음). 회사를 그만둘 명분이 생긴 거예요. 아무리 일이 힘들다 해도 그만둘 이유가 생기지 않으면 좀처럼 행동으로 옮길 수 없으니까요. 일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유 없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점점 행동으로 옮길 수 없게 돼요. 그래서 선배들에게 '네가 하고 있는 일에는 미래가 있다.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듣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그런 말은 제대로 새겨들어야만 해요.

 

요네다: 처음 글을 썼는데 5~6만 엔을 줬다니 좋은 분 같네요.

 

이토: 논문이어서 페이지가 많았어요. 십 몇 페이지나 되었기 때문에 페이지당 단가가 수천 엔이라도 고마운 일이었죠. 당시에는 월급 말고는 버는 게 없었으니까 그게 독립의 계기가 되었어요. 생각해보면 그 경험에서 지금 깨달은 게 있어요. 저는 '생업이라고 하지만 일을 대여섯 개 만드는 건 힘든 일이다, 보통 사람은 못 한다'는 지적을 듣는데요, 처음 한 개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게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에요. 회사 월급 말고 자기 힘으로 2~3만 엔을 벌 수 있게 되면 정말로 세계관이 달라져요. 그걸 첫 원고료를 받고 실감했어요. 나한테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요.

 

요네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으로 만든 생업은 첫번째가 자유기고가, 두번째가 몽골 진짜배기 생활체험 투어가 되는 건가요?

 

이토: 몽골에는 대학생 시절에 자원봉사 활동을 하러 일 년에 한 번 정도 갔었어요. 왜 자원봉사를 하러 갔느냐면 제가 참가하고 싶은 투어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회사를 그만둔 뒤에 뭔가 생업을 만들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몽골에서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체험하는 투어를 떠올렸어요. '진짜배기 생활체험 투어'라는 이름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이 아니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어요. 게다가 '일정은 정해져 있지 않다' '현지 생활문화를 익힌다' '돌발 사고 환영' 등을 테마로 몽골 문화를 체험하는 워크숍을 해보자고 생각한 거죠.

 

 

잡지 원고료를 받고 독립 결심
첫 번째 생업이 ‘몽골 진짜배기 생활체험 투어’
‘손님은 왕’이라는 서비스의 개념 뒤집고 고객과 대등한 관계 맺어

 

 

요네다: 고객에게 아첨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이토: 그렇죠. 콘셉트에 맞는 사람만을 모집함으로써 일반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보자 싶었어요. 웹사이트에 올린 모집 공고도 꽤 길어요. 스크롤도 몇 번이나 해야 하고 다 읽으려면 꽤 시간이 걸리죠.

이건: 중요한 사항인데요, 긴 글을 다 읽고 이에 납득한 사람만이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탈락하는 거죠.

 

요네다: 보통 상품 설명은 짧고 이해하기 쉽게 하는 거잖아요. 이토 씨의 아이디어는 거꾸로 '마지막까지 다 읽은 사람만을 투어에 참가시키고 싶다'는 필터링 같은 거네요.

 

이토: 여행사처럼 고객에게 친절한 투어도 물론 있어야 하겠죠. 하지만 그 외에도 여행의 형태는 무한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좀 힘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투어 내용도 더 충실해질 수 있어요. 저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의 한계'를 회사를 다니면서 통감했어요. 분명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지금까지 장사의 원칙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면 못 하게 되는 것이 많아요.

 

요네다: 특히 일본형 서비스는 '극진함'을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토: 그것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하려고 들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만 해요. 몽골 투어에서도 승마 같은 건 할 수 없죠. '승마를 했다가 엉덩이 피부가 벗겨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니까요. 그런 식으로 사라져버린 여행의 가능성을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누구라도 일단 오세요'가 아니라 '괜찮다면 한번 와주세요'라는 느낌이랄까요. 고객과 대등한 관계를 맺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투어 신청을 받았더라도 '우리보다는 다른 서비스에 더 잘 맞겠다' 싶은 분이면 다른 곳을 소개해주기도 해요.

 

요네다: 일본에서는 '손님은 왕'이라는 생각이 장사의 기본 같은 것이니까요.

 

이토: 그렇게 하지 않는 방식이 서로 건전하다고 생각해요.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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