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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추천-여자는 체력] 나는 왜 사서의 길을 포기하고 운동처방사가 되었나

by 나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지식교양 2019. 10. 24.

합기도, 주짓주, 태권도, 복싱은 기본,
에어로빅에 크로스핏까지 섭렵한 운동 코치 박은지.
본투비 격투 소녀가 아닐까 싶지만 
자기 몸을 혐오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비만아였다.

눈눈뜨고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놀기만 한 유년기에 나는 가장 자유롭고 즐거웠다. 그런데 ‘산, 계곡, 공,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같은 단어가 일으키던 설렘은 내 몸에 사춘기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누가 억지로 끊어 낸 듯 아프게 떨어져 나갔다.
“에그, 여자애가 왜 이렇게 과격하니?”
“무슨 여자애 목소리가 그렇게 커? 조신하지 못하게!”
사실 그전부터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은 이런 말에 어느 순간 내 움직임과 목소리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힙합 바지로 온 길을 청소하고 다니던 중학생 시절, 내 몸이 점점 커졌다. 지금 생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성장인데, 그때는 살찐 내 몸에 대한 비난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쑥불쑥 떠올랐다. 
‘난 뚱뚱해! 난 흉측해!’ 
살이 찐다는 것은 곧 외모 계급에서 하층으로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살이 찐다는 것은 외모 계급에서 하층으로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출처: https://pixabay.com

살을 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몸만 망가졌고,
우연히 발을 들인 합기도 도장에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열정에 더해 격투기에 대한 로망 때문에 만 열여덟 살 때 동네 합기도장에 발을 디딘 후 다양한 격투기를 배웠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도 어느 도장에서든 성인 여자 수련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종목이라지만, 비슷한 시기에 도장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몇 개월 뒤까지 남아 있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때가 많았다. 
처음 수련을 시작하는 날 “귀한 여성 분이 오셨으니 잘해 드려라.” 하고 관장님이 나를 소개하면 도장이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부킹하는 것 같았다. 많은 도장에서 나는 홍일점으로 추켜세워지는 방식으로 배려(라는 이름의 배제)를 당하거나 ‘여자치고는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어떤 관장님은 손 미트 치기가 끝난 뒤 잘했다며 미트를 낀 손으로 내 엉덩이를 세게 치기도 했다. 내가 화를 내면 딸 같아서 그랬다며 징그럽게 웃었다.  

"만 열여덟 살 때 집 근처 합기도장에 발을 디딘 후부터 인생이 달라졌다." 출처:  https://pixabay.com


신촌의 복싱 도장을 다닐 때 운동 시간이 겹쳐서 자주 본 50대 아저씨가 있다. 키는 나와 비슷하고 몸은 군살이 없이 단단한 분이었다. 나를 보면 ‘공주님 오셨다’면서 낯간지러운 인사를 했는데, 가끔 스파링도 하면서 그럭저럭 좋은 운동 파트너로 지냈다. 
어느 날 체육관에 들어서니 이 아저씨가 헤비급 선수로 활동하는 덩치 큰 남자와 스파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가 그 선수한테 무지막지하게 맞고 있었다.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운 스파링이 끝난 뒤 아저씨가 퉁퉁 부은 얼굴로 로프에 팔을 걸고 엎드리듯 기대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별 생각 없이 링에 올라갔다. 그런데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내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뜻밖의 상황에 제대로 방어도 못 하고 얼굴과 복부를 많이 맞았다. 스파링이 아니라 분풀이였다! 이날 당한 난타로 복부 손상을 입은 나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거의 한 달 동안 설사를 했다. 

"신촌에 있는 복싱 도장에 다닐 때는 프로선수와 스파링을 하다 얻어터진 50대 아저씨의 분풀이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출처: https://pixabay.com

도서관 사서의 길을 버리고 체육인으로 진로를 바꾼 후  
때로는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수련생으로, 
때로는 운동 산업에 몸담은 트레이너로 일하며 그녀는 깨달았다.
여성들이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과 
'개개인의 몸에 맞게 설계된 운동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분명히 살을 빼려고 운동 센터에 찾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살 빼고 몸매 만드는 것보다 마음 편히 오래 다닐 수 있는 운동 공간과 믿을 수 있는 코치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다한 일상의 스위치를 잠시 끄고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곳, 다치거나 아파서 움직임이 전만 못해도 찾아가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운동 공간이다. 화장을 어떻게 하고 옷은 어떻게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지나친 관심과 무례한 질문에 시달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이다. 

"우리에겐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운동 공간과 믿을 수 있는 코치가 필요하다." 출처: https://pixabay.com


내 몸 상태에 알맞은 운동법에 대해 상담할 만큼 전문성을 갖춰 믿을 수 있는 코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엔 그 지역 코치에게 내 병력을 포함한 몸의 역사와 운동의 기록과 특성 등을 잘 전해 건강한 생활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운동 주치의’ 같은 코치가 있는 운동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

초등학생부터 80대 여성 노인까지, 
장애가 있거나 질환을 앓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운동을 처방하고 그룹 운동을 지도해온 지 7년

운동을 하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을 때마다 몸과 운동에 대해 기초부터 제대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누군가 내가 원하는 운동 공간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문헌정보학과 졸업 후 체육교육학과에 학사편입을 했다. 체육교육학과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 운동생리학을 전공했고 운동처방 자격증을 땄다. 
외모나 성별 때문에 차별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운동 문화를 만들기 위해 동료와 커뮤니티를 찾던 중 2012년에 서울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의료사협)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부터 2019년까지 ‘기계가 아니라 관계로 건강해지는’ 살림의료사협 운동 센터 ‘다짐’에서 운동처방사로 일했다. 가정의학과 의원, 치과, 운동 센터가 함께 있는 의료협동조합의 운동처방사로서 활동한 7년은 막연하기만 하던 ‘다양한 몸과 정체성이 어우러진 운동 공간’을 실제 몸으로 느끼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어서 귀한 시간이었다.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운동 센터 '다짐' (사진 제공: 박은지)

최근 서울의 한 여자 중학교 1학년생들에게 자기 몸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위를 그려 보고, 왜 그런지 말해 달라고 했다. 이 때 학생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말을 했다. 
“저는 키가 너무 작아요. (또는 커요.)” 
“다리가 짧아요. (또는 굵어요, 털이 많아요.)” 
“배(또는 허리, 옆구리, 허벅지, 팔, 목)에 살이 쪘어요.”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여자아이들이 자기 몸을 혐오하는 것은 내가 중학생이던 20여 년 전과 다르지 않다. 자기 몸에 만족한 아이는 50명 가운데 세 명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실체 없는 몸과 자기 몸을 비교하며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했다. 실체 없는 몸이란 세상이 요구하는 여성의 몸,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몸, 가슴과 엉덩이만 풍만해 보이도록 이미지 보정 프로그램을 통해 깎이거나 부풀려진 몸이다. 그리고 이런 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하는 운동책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내 몸을 어떻게 바라 봐야 할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이야기하는 책은 아직 많지 않다. 운동과 자기방어를 가르치는 코치로서, 긴 세월 동안 내 몸을 지독히 혐오한 여성으로서 나는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알게 된 ‘여성과 운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운동의 필요는 느끼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넘쳐 나는 다이어트 정보 중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자기에게 맞는 운동 센터와 트레이너를 찾고 싶은 사람 
나이가 많아서,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운동이 꺼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처방사 박은지의 여성주의 건강 지침서


저자: 박은지(데조로)

한성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후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학사편입하여 공부하였다. 운동생리학으로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원 졸업 후 문화체육관광부 생활체육지도자 1급 운동처방사(건강운동관리사) 자격증을 땄다.
합기도(대한합기도 세계 선수권 대회 2위, 2004) 도장에 발을 디딘 후부터 주짓주, 태권도, 복싱 등 다양한 격투기를 배웠고, 지금도 한두 해에 한 번씩 3~6개월은 격투기 수련을 한다. 그밖에 태보 에어로빅, 크로스핏 레벨1 트레이너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2013년부터 7년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건강 센터 ‘다짐’에서 일하면서 초등학생부터 80대까지, 장애가 있거나 질환을 앓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운동을 처방하고 그룹 운동을 지도해왔다.
2011년부터 자기방어 훈련 교육을 시작했고, 2018년부터는 서울 소재 여중, 여고에서 10대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소셜벤처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주)프롬더바디를 공동 설립하여 운동주치의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tesoro_g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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